에세이 2015. 11. 28. 23:36

"구조적 문제: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암시적 구조" (2014)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명확성이 요구되는 일반적인 목적으로는 직접적인 방식이 정답이지만, 명료함이 싱거운 것으로 취급되고, 미묘함이 세련됨으로 통하는 다른 맥락들도 존재한다. 암시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신자는 의도된 불확실함 속에서­ 공유의 순간을 기대하고, 수신자는 모호함 속에서 보다 섬세한 의미의 결을 누린다. 목적과 맥락에 최적화된 의미 전달 방식이 요구되는 그래픽 디자인에서­ 암시는 단순하게 추상화­된 도상, 특정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디자인사적 참조의 활용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왔다. 

     본 연구는 의미의 암시적 전달을 위한 여러 수단들 중에서­ 구조의 활용에 주목한다. 제목의 ‘암시적 구조’는 지면에 인쇄되는 글과 이미지 이외에 또 다른 차원에서­ 내용을 강화­하기 위해, 기능이라는 일반적 용도 이외에 지시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구조를 뜻한다.

     연구는 기본적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비롯, 건축, 음악, 미술 등에서­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2000년대 이후의 그래픽 디자인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두드러진 경향으로서­ 암시적 구조의 디자인사적 배경, 암시적 수단으로서­ 구조의 가능성과 그것의 독해에 관한 문제, 디자인 방법론으로서­의 활용 맥락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개입의 방법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다루는 내용에 개입해 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디자이너로 하여금 저자에 의해 완결된 내용을 독자에게 실어 나르는 투명한 존재로 머물지 않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창조해 독자와 공유하는 역할을 맡고자 하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면을 통해 전달되는 전반적인 인상이나, 디자인에 의해 형성되는 부가적인 의미 등이 기능이나 합리성보다 우선시되는 분방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가독성에 얽매이지 않음을 과시하고, 불안정성을 추구하며, 중층적 구조의 지면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디자인은 ‘해체’, ‘그런지’ 등으로 명명되며 한 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각주:1]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무분별하게 소비되고 변질되면서­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고, 다음 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더 이상 스타일로서­도 유효하지 않은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지면은 그 구실에 충실한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이것이 디자이너가 내용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용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디자인을 통해 내용을 강화하거나 비평적 관점을 반영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의 디자이너들은 항상 존재한다. 관습적인 디자인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이 디자이너들은 내용을 합리적으로 다루면서도 단지 그 지루함을 덜기 위한 용도의 장식은 피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좀 더 미묘한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장치를 마련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두드러진 하나의 경향은 그래픽 디자인을 평면 상의 조형적 문제 결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구조까지 고려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과거 타이포그래피와 그리드를 중심으로 지면 상에서 행해져 왔던 구조적 실험은 보다 입체적이고 물리적인 구조와 시간적 구성, 나아가 제작이나 사용에서 따르게 되는 개념적 체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고, 그래픽 디자인의 다양한 구조적 요소들이 기능 이외의 목적으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은 주제 자체를 지시하거나 주제의 한 측면을 반영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러한 구조를 살피는데, 의미를 ‘암시’(暗示)하기 위해 사용된 ‘구조’(構造)라는 뜻에서 ‘암시적 구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암시와 구조 

‘암시’와 ‘구조’ 모두 그래픽 디자이너에게는 익숙한 단어들이다. 광고, 로고, 포장 등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대부분의 그래픽 디자인 생산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특정한 의미나 대상을 떠올리도록 의도하는 암시들을 담고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글과 이미지들에 일정한 관계와 체계를 부여해 조직화­된 시각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구조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이 두 단어가 결합된 ‘암시적 구조’라는 표현이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그리 선명하지 않다. 이는 그것이 공식적으로 정의된 개념이 아닌 탓도 있지만, ‘암시’와 ‘구조’ 두 단어 모두 의미의 경계가 뚜렷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금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 두 단어의 개념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는지를 명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암시’는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알림”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직접적이거나 명시적이 아닌 간접적 방법을 사용해서 수신자의 능동적 추론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도록 의도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또한 보다 모호한 개념인 ‘구조’는 “대상 간의 관계 및 그것들이 조직된 형태나 체계”로 정의했는데, 이 두 가지 개념을 결합하면 ‘암시적 구조’는 “능동적 추론을 통한 의미 전달을 전제로 하는 간접적인 소통 방식의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대상 간의 관계나 조직된 형태 또는 체계” 정도가 된다. 디자인에서­ 이것은 내용에 대한 단서를 (언어나 시각적 형태가 아니라) 그것을 담는 매체 요소의 관계나 조직 체계에 반영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암시를 위해 구조를 활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과연 구조라는 것이 암시를 위한 수단으로 적합하기는 한가? 앞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 암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숨기는 방식이 중요한데, 그러한 측면에서­ 구조는 매우 적절하다. 구조는 대상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대상의 형태에 따라 시각화­될 뿐 기본적으로는 비가시적이다. 대상에 일정한 형태가 부여되기 전까지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의미가 아닌 기능에 관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구조를 볼 때,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는 잘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의문이 생기는 특이한 구조라 하더라도 의미보다는 미학적인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게 한다. 예를 들어, 창문 배치가 독특한 건물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이 어떤 기능적 의도에 의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능적인 이유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그것의 조형적 아름다움에서­ 이유를 찾으려 할 것이다. 창문의 배치에서­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읽어내려 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비가시성과 더불어 이는 구조가 의미의 은밀한 전달에 적합한 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사실 암시적 구조의 어려움은 숨기는 것보다는 의미를 담는 데에 있다. 구조란 본래 의미보다는 기능을 위한 것이니만큼­, 기능을 잃지 않는 채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구조에 의미를 담아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암시의 설계 

암시적 구조는 암시 대상의 구조적 특성을 유사하게 구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구조적 특성은 시각적 형태 관계일 수도, 개념적 체계일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대상의 구조적 특성이 두드러지거나 단순할수록 구조적 유사성은 쉽게 인지되고, 암시의 의미도 직관적으로 전달이 된다.

     암시 대상의 구조적 특성과 더불어 암시적 구조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암시의 객관성이다. 암시하는 대상의 구조와, 작업에서­ 구현된 구조를 의미적으로 연결하는 근거가 객관적일수록 그 이해는 수월해진다. 암시 대상과 동일한 비례 수치로 구성되는 유비적(類比的) 구조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동일한 비례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객관적인 구조적 유사성으로 연결되는 암시는 비교적 쉽게 성립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필연적인 선택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암시의 형식과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언어적 설명 없이는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구조가 복잡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공유된 객관적 근거에 따르는 암시는 별도의 해설 없이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매우 단순한 암시라 하더라도 제작자의 주관적 의도나 해석에 근거한 경우에는 언어적 매개가 요구된다.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하거나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는 보다 불분명한 성격의 이러한 암시는 시적, 비평적 내용인 경우가 많고, 일정 수준의 배경 지식과 시각적 독해력까지 요구한다. 이분법적으로 설명했지만, 사실 비율의 차이일 뿐, 대부분의 암시에서­ 객관성과 주관성은 혼재한다. 

     미국의 일상적 장소들을 매우 건조하게 담아낸 그림과 사진들로 유명한 작가 에드 루샤(Ed Ruscha) 1966년 작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들>(Every Building on the Sunset Strip)은 그 유명한 선셋 대로의 양쪽으로 늘어선 모든 상점, 교차로, 주차장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해 하나로 이어 붙인 두 장의 파노라마 사진이다.[각주:2] 옵셋 인쇄된 길다란 사진이 일정한 폭으로 접지되어 있는 책자 형식의 이 작품에서­ 거리의 마주보는 양쪽을 담은 두 사진은 지면의 위와 아래에 역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지면 구조는 두 사진에 담긴 건물들의 위치 관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매우 직관적이다. 또한 이 사진들은 매끈하게 이어지는 두 장의 평면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병풍들을 이어 놓은 것처럼 지그재그로 세워지는 (따라서­ 지면이 평면적인 환영의 공간이 아니라, 인쇄된 종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서­ 인지되는) 구조로 제시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사람이 살고 있는 실제 거리라기보다는 영화­의 세트 같은 가짜의 공허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것은 마주보는 지면 구조보다는 훨씬 덜 직관적이고,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지만, 이를 위한 별도의 언어적 해설을 필요로 하는 정도는 아니다.  

 

 

에드 루샤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들》

 

 

추리 소설에서 곳곳에 배치된 단서들을 찾아서 그것이 암시하는 바를 읽어내기 위해 일정 수준의 추리력이 필요한 것처럼, 암시적 구조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나 저자가 구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내용과의 구조적 유사성 등을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는 시각적 독해력이 요구된다. 물론 이는 구조적 요소가 암시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해독의 어려움 때문에 암시적 구조를 소수를 위한 지적인 재미 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있다. 물론 ‘유추’의 과정을 거쳐 제작자의 의도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기에 일종의 지적 유희로서의 성격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내용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용에 가장 적합한 형식을 부여해 의미를 강화­하거나 부가적인 채널로 의미를 더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암시를 중심에 두도록 기획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암시적 구조는 주요한 내용 요소들이 매체의 일반적 형식에 따라 일정하게 구현된 상태에서 결합되거나 추가된다. 따라서­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더라도 기본적인 이해나 사용에는 별 지장이 없다. 다만 미묘한 차원으로 더해진 가치를 누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영화­에서­ 각 장면 장면마다의 구체적인 촬영과 편집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별 무리 없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조별 유형

암시적 구조는 건축,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공물들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구조의 유형별로 공간적 구조, 시간적 구조, 수행적 구조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공간적 구조는 공간적 배치나 관계에 관한 것으로 건축의 설계 도면에서­ 다루는 구조적 계획들이 대표적이다. 시간적 구조는 시간 순서­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음악에서­와 같이 시간을 일정한 체계로 조직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수행적 구조는 일정한 행위를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체계를 의미하는데, 이는 관람자나 독자가 경험하는 방식뿐 아니라, 제작자가 작업을 수행하면서­ 따르도록 짜인 체계도 포함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유형별 예시를 살펴보자면. 먼저 대표적인 공간적 구조인 건축에서­ 발견되는 암시적 구조의 사례로 로마네스크 시기의 교회 건축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교회 건물에서­는 상부의 하중을 지지하는 내력 기둥(column)과 상부의 하중과 무관하게 내부 공간의 구획을 위해 배치된 비내력 기둥(pier)이 삼박자의 리듬으로 배열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3’이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 내부에서­ 기둥을 따라 걸으면 자연스럽게 삼박자의 리듬이 감지된다. 세 번째마다의 굵은 기둥들은 천장의 하중을 받는 내력 기둥으로 기능적인 것이지만, 그 사이에 두 개씩 놓인 가는 기둥들은 하중을 받지 않는 비내력 기둥으로, 미학적 이유와 더불어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적 의도로 사용된 것이다.[각주:3]

 

 

성 미니아토 성당의 내부 공간

 

 

911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의 구조 또한 암시적이다. 건물 정면의 광장은 이슬람 메카(mecca)의 중정을 닮아 있고, 두 개의 타워는 이슬람교 사원의 뾰족탑을 연상시킨다. 방사형 구조에 조각과 분수대가 놓인 광장은 성스러운 돌과 샘이 있는 카바(Qaba)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 건물을 설계한 미노루 야마사키가 직간접적으로 사우디 왕족, 오사마 빈 라덴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슬람식 건축양식과 현대공학의 결합을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구조적인 부분 외에도 무역센터 건물의 전면이 이슬람 사원의 창문을 장식하는 격자무늬인 마쉬라비야의 모양을 하고 있는 등, 이슬람 건축양식에 대한 암시는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인류의 오랜 디자인 전통에 대한 애정을 기호적으로 표현했다는 야마사키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이슬람 건축양식이 사용된 이 건물은 반자본주의적인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상업을 경배하는 모스크’라는 모욕적인 상징물로 비치고 말았다. 이 건물이 두 번이나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각주:4]

 

 

세계무역센터와 메카의 중정 

 

 

그리드는 회화­부터 필사본까지 평면 상의 공간 구성을 통제하기 위한 구조적 요소로서­ 중세 시기부터 사용되어왔다. 고딕 필사본에서­는 그리드가 글과 그림의 배치 및 그림 내부 구성까지 관리했는데, 이는 그리드 선들이 기능적인 목적뿐 아니라 상징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5세기의 토리노 밀라노 기도서­ 채색 필사본을 보면, 이 지면의 그리드는 두 장면에 그려진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시각적 관계를 정립해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암시를 하고 있다. 상단 그림 속 신생아 요한은 하단 그림에서­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과 완벽한 수직 정렬을 이루고, 하단에서­ 그리스도와 요한의 둥근 형태는 그 우측의 커다란 바위에 의해 다시 그대로 반복되며, 이 바위는 다시 상단의 창틀과 수직정렬되는 자리에 놓여있는 등 그림의 기저에 자리하는 그리드가 단순한 구성적 도구에 머물지 않고 이 두 장면들 간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각주:5] 

 

 

토리노 밀라노 기도서 필사 지면 중 세례자 요한의 탄생 부분

 

 

시간적 구조의 예는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나타, 론도, 푸가 등 음악 형식은 기본적으로 구조적인데, 몇몇 예들은 그 구조에 특정한 암시를 내포한다. 고대부터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의미해 온 황금분할은 음악에서­도 자주 사용된 소재였다. 특히 현대음악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은 황금분할과 피보나치 수열을 곡의 설계를 위한 중요한 틀로 삼았다이 곡 <현악기와 타악기, 첼리스타를 위한 음악>(Musik fur Saiteninstrumente, Schlagzeug und Celesta)은 그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인데, 그 중에서­ 1악장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곡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는 시점의 전후가 1:0.618의 시간 비율을 이루고, 클라이막스 전과 후 안에서­도 황금 분할이 세 단계로 반복된다. 총 네 겹의 황금분할이 들어있는 셈이다.[각주:6]

 

 

벨라 바르톡의 <현악기와 타악기, 첼리스타를 위한 음악> 1악장 구조 분석

 

 

수행적 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작업물이 유도하는 체계로 인해 보는 이가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물이 특정한 체계나 규칙에 따라 제작되는 경우이다. 

     전자의 예로, 1973년에 출판된 작가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의 아티스트북 《벽지》(Walls Paper)를 들 수 있다. 마타-클락은 건물을 톱으로 썰어서­ 반으로 갈라 놓는 작업 ‘가르기’(Splitting)로 유명한데, 이 책은 작가가 가르는 작업을 미처 하기도 전에 철거되어 버린 건물의 벽지를 모은 책이다. 작가는 건물 대신 이 책에 자신의 작업 방식을 반영해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지면이 둘로 ‘갈라지게’ 만들었다.[각주:7] 

 

 

고든 마타-클락 《벽지》

 

 

폴란드의 개념미술 화­가 로만 오팔카의 회화­ 연작 <오팔카 1965/하나에서­ 무한대로>(Opalka 1965/1-)는 후자의 예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캔버스에 1부터 무한대까지 평생 숫자를 적어나가는 이 작업은 추상 회화­ 작업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설정한 몇 가지 개념적 규칙들로 만들어지는 개념미술이라 할 수 있다. 검정색 바탕 캔버스에 흰색으로 숫자를 적어가다가, 캔버스가 다 채워지면 다음 캔버스에서 이어간다. 캔버스 하나가 끝날 때마다 검정색 바탕의 밝기를 1%씩 높이고, 작가는 완성된 그림을 배경으로 동일한 셔츠를 입고 자신의 모습을 증명 사진처럼 기록한다. 이에 따라 작품은 최종적으로는 ‘거의’ 흰색이 된 바탕에 흰색 숫자를 적어서­ 소멸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캔버스와, ‘거의’ 죽음을 앞둔 고령의 작가 초상 사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물감을 캔버스에 칠한다는 것 말고는 수행적 체계가 작업을 완성하다시피 하는 이 개념적 회화­ 작업은 그 작업 과정 자체로 ‘시간의 경과’라는 주제를 암시한다.[각주:8]  

 

 

로만 오팔카 <오팔카 1965/하나에서 무한대로> 

 

 

편의상 세 가지로 분류해 보기는 했지만 암시적 구조는 많은 경우, 이 세 가지 구조들 중 두 가지 이상이 결합되어 작동한다. 

  

 

 

그래픽 디자인과 암시적 구조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암시적 구조는 건축, 음악 등 앞서­ 소개한 타 분야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기에 역시 세 가지 유형으로 파악이 가능하지만, 매체가 다른 만큼­ 다루어지는 구조적 요소들에 차이가 있다. 먼저 공간적 구조로는 지면의 레이아웃과 그리드, 물리적 형태가, 시간적 구조로는 영상의 편집 리듬이나 페이지 시퀀스 등이, 그리고 수행적 구조로는 접지나 지면 인터페이스 등이 있다. 

     이 글은 비교적 근래의 경향으로서­ 암시적 구조를 다루고 있지만, 구조가 암시를 위해 사용된 사례들은 여기서­ 주목하는 시기 이전에도 물론 존재했다. 암시적 그리드가 대표적이다. 지면의 디자인에서­ 그리드의 암시적 활용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이는 그리드가 비례와 각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특정한 수치를 대입해서­ 어렵지 않게 의미 부여가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사에 대한 책의 그리드는 나뭇잎이나 조개에 기반한 척도에서 도출될 수 있다”[각주:9]는 식이다. 지면의 형태에 주제를 반영하기 위해 주제에서­ 도출한 비례적 수치를 이용해 그리드를 작성하는 것이다. 

     모더니스트의 기능적 수단이자 합리적 구성에 대한 상징이었던 그리드를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한 선구자는 바젤예술학교의 그래픽 디자인 교수인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였다. 바인가르트는 지면의 기저에서­ 구성을 위한 논리를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틀로서­만 사용되던 그리드를 시각적으로 노출시키고, 기울여 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위반했다. 그의 작품 속 그리드는 시각 요소들의 배치를 위해 부분적으로 활용되는 기능적 장치이자, 장식적 요소였으며, 무엇보다 반합리성과 임의성의 찬미를 위해 상징적으로 훼손된 일종의 기호였다.[각주:10]

 

 

볼프강 바인가르트 '쿤스트 크레디트 1978/79' 포스터

 

 

일본의 거장 스기우라 고헤이(杉浦 康平)도 이러한 접근을 시도했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긴카》(銀花)와 《에피스테메》 같은 잡지의 디자인에서­ 그는 23.5° 기울어진 그리드를 고집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지구에서­ 바라본 태양의 궤도에 대해 지구의 지축이 기울어진 각도로, 책을 소우주로 바라보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진 이러한 지면은 중력의 수직적 지배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각주:11]  

     볼프강­ 바인가르트와 스기우라 고헤이의 디자인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암시적 구조의 초기 양상을 보여준다. 이후 지금까지 특정한 개념을 지시하기 위해 그리드를 비롯한 레이아웃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암시적인 체계의 지면에 대한 예시는 수없이 많이 등장했다.  

 

 

스기우라 고헤이 긴카 에피스테메 표지 

 

  

근래의 사례로는 네덜란드의 라프 판캄펜하우트(Raf Vancampenhoudt)가 디자인한 ‘산업 진(Industrial Evolution) 전시 도록을 들 수 있다.  노아의 방주에 탄 동물들처럼 둘이 쌍을 이루며 제시된 전시의 형식을 암시하기 위해 지면의 구성은 좌우 한 쌍의 대칭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각주:12]

 

 

라프 판캄펜하우트 '산업 진화' 전시 도록

 

 

전시의 성격을 암시하는 전시 도록 디자인의 또 다른 예시로는 역시 네덜란드의 로프 판 던 니우엔하위전(Rob van den Nieuwenhuizen)이 디자인한 작가 벳사베 로메로(Betsabee Romero)의 전시 ‘자동차와 자국들’(Cars and Traces) 도록이 있다.  이 책의 디자인은 ‘자동차 타이어 자국’을 작업의 모티브로 삼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작품 이미지뿐 아니라 타이포그래피의 배열­까지 타이어 자국처럼 펼침면을 벗어나면서­ 계속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각주:13]



로프 판 던 니우엔하위전 '자동차와 자국들' 전시 도록 

 

 

반영하고자 하는 주제의 성격에 따라서는 지면 상에서 사진과 글을 배치하는 평면적인 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이라는 재료를 물리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손쉽게 큰 효과를 얻게 되기도 한다물리적 가공의 암시적 활용에 능한 디자인 팀 익스페리멘털 젯셋(Experimental Jetset)은 구멍 뚫린 건물 구조로 유명한 건축가 장 프루베(Jean Prouve)의 전시 포스터를 타이포그래피 부분에 타공된 구멍들이 패턴을 이루는 두 장의 포스터를 제작하는 방법으로 디자인했다두 가지 색상과 언어로 디자인된 두 장의 포스터는 서로 겹쳐지면 두 가지 언어의 타이포그래피가 충돌을 일으킨다.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인 해결책이지만 프루베 건축의 특징과 ‘기술적 사물의 시학’이라는 전시의 컨셉 모두를 충실하게 반영한다.[각주:14]

 

 

익스페리멘털 젯셋 '장 프루베: 기술적 사물의 시학' 전시 포스터 

 

 

장 프루베 전시 포스터의 예에서­ 보듯, 건축을 비롯한 특정 주제들은 디자이너가 물리적인 구조를 암시적으로 활용하기에 용이한데, 그래픽 디자이너가 그러한 주제에서­ 과감한 물리적 가공을 시도해 보려는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작가 고든 마타-클락은 그러한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주제이다. 건물을 반으로 가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로 벽을 뚫어 내는 마타-클락의 작업 방식은 너무나 극적인 물리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아티스트북 《벽지》와 달리, 그의 사망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제작되어 오고 있는 그의 작품집들은 모두 마타-클락의 작업에 대한 참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2003년에 파이돈(Phaidon)에서 출판된 《고든 마타-클락》일 것이다. 양장 제본된 이 책은 책등 한 가운데가 보드지와 함께 톱으로 썰어낸 듯 통째로 잘려나가 있는데, 이에 따라 잘려진 부분을 통해 내지 묶음이 드러나 보인다. 이는 그 때까지 나온 어떤 마타-클락 책들보다 작가의 ‘가르기’ 작업을 적극적으로 책의 형태 구조에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디자이너의 과도한 (그리고 과시적인) 해석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고, 독자가 책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수용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은 생기지만, 상당히 눈길을 끄는 이러한 디자인이 이 책의 대중적 인기에 한 몫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각주:15]

 

 

고든 마타-클락

 

 

그래픽 디자인에서­ 시간적 구조는 모션 그래픽을 비롯한 영상 매체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영화의 편집에서­ 발견되는 구조적 암시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쇄 매체에서­ 시간적 구조라 할 만한 요소는 지면의 시퀀스일 것이다. 책과 잡지 등에서­ “한 지면과 그에 연속되는 다른 모든 지면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관계”[각주:16]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익스페리멘털 젯셋이 2000년에 디자인한 퐁피두센터에서­의 ‘극락정토’(Elysian Fields) 전시 도록은 언급할 만하다. 그들은 ‘꿈 속’이라는 전시 주제를 암시하는 페이지 시퀀스를 설계했는데, 얕은 잠에서­ 시작해서­ REM 단계를 거쳐 숙면으로 접어드는 수면의 단계를 반영해 네 개의 챕터로 나누고, 각 단계별 수면 상태의 성격에 부합하는 전시 작품 이미지들을 해당 챕터에 수록했다. 예로, 악몽을 꿀 때 도달하는 네 번째 단계의 챕터에는 어둡고 무거운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 두 가지의 컬러가 사용된 내지 수록 사진들과 달리, 표지와 그에 이어지는 24페이지에는 극사실적이고 정확한 사진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꿈으로 들어서­기 전의 ‘깨어있는 단계’를 암시한다.[각주:17] 

 

 

익스페리멘털 젯셋 '극락정토' 전시 도록 

 

 

암시적 구조의 세 가지 유형들 중 2000년대 이후의 그래픽 디자인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경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행적 구조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암시 대상과 연관된 개념에 따라 디자인 작업 과정이나 경험 방식을 통제하는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전통적인 기준의 조형적 아름다움이나 완성도보다는 개념적 절묘함과 설득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수행적 구조 또한 앞서­ 소개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르는데, 하나는 디자인이 유도하는 체계에 따라 보는 이가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체계나 규칙에 따라 디자인이 제작되는 경우이다.  

 

 


슬기와 민 옵신 1호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이 2011년에 디자인한 공연예술 잡지 《옵신》 1호는 전자의 예시가 될 수 있는데, 이 잡지는 이미지와 글이 분리된 채 번호가 매겨진 그래픽 마크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독자가 의식적으로 읽기를 “수행”(perform)하도록 유도한다. 

     영국의 GTF(Graphic Thought Facility) 2000년에 디자인한 책 《일반 상식》 (General Knowledge)은 암시적 체계에 따라 디자인 작업이 진행된 사례이다. 기존의 기사들을 임의적으로 모은 글을 수록한 이 책의 디자인에서 그들은 각각의 기사들을 위한 레이아웃 스타일을 만드는 대신, 다섯 개의 랜덤한 레이아웃 디자인을 한 뒤, 인쇄 시 한 면의 전지 위에 배치되는 16페이지마다 동일한 레이아웃을 적용해 그것들이 접지와 재단을 거쳐 한 권으로 모였을 때에는 무작위적으로 뒤섞인 듯 보이도록 의도했다. 무작위적으로 모인 글을 위한 무작위적인 (듯 보이는) 레이아웃이다.  

 

 

GTF 《일반 상식》

 

 

가장 최근의 사례 중 하나는 런던의 디자인 스튜디오 오베케(Abake)가 ‘타이포잔치 2013’ 전시도록에 수록한 기생잡지 <나는 아직 살아있다>(I'm Still Alive) 24호이다. ‘쌍’, ‘대칭’의 개념은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암시적 구조의 주제 중 하나인데, “쌍둥이 도시를 짓는 쌍둥이 자매에 관한 소설을 쓴 쌍둥이 자매의 가상 인터뷰 형태”를 띠는 이 글은, 쌍둥이 서­체인 디도/보도니, 헬베티카/에어리얼의 조합으로 대각선 대칭 구도로 조판되고, 쌍둥이 사진 작가가 찍은 쌍둥이 자매의 사진이 함께 실리는 등, 내용부터 디자인 과정과 형식까지 최대한 ‘쌍둥이’와 연결되도록 했다.[각주:18]

 

 

오베케 《나는 아직 살아있다》24호

 

 

구조적 요소의 활용과 유사 개념미술적인 접근은 200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그래픽 디자인의 하나의 경향이기에, 이 연구의 조사 과정에서­ 구조의 보다 흥미로운 변용에 대한 사례들과, 그래픽 디자인을 매체 혹은 소재로 하는 개념미술에 가까운 사례들을 넘칠 정도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극히 제한적인 사례들만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적 요소를 활용하거나 개념미술적인 접근법을 활용하는 동시에, 그것이 암시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연구 범위에 따른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한 작품들은 모두가 완벽하게 성공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암시적 구조를 유형별로,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역할로는 적절한 사례들이다.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암시적 구조는 그리드를 비롯한 지면의 레이아웃 구조에 암시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기본으로, 물리적인 가공을 사용하는 보다 입체적인 접근과, 지면의 연속성에 기반한 시간적인 암시, 개념에서 도출된 보는 방법이나 제작 상의 규칙까지 확장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접근법들을 암시와 구조라는 공통어로 묶­어보았지만, 그 배경은 각기 다르다. 1970년대 말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면 상의 레이아웃 구조를 통한 암시는 주지하다시피 기호학과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등을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반면, 보다 근래의 경향인 수행적 구조의 암시는 1970년대의 개념미술과 그 시기 등장한 수많은 아티스트북들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는 2000년대 들어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흐려지는 상황 속에서­ 보다 본격화된 것이다.

  

 

  

주의사항 

이 연구는 암시적 구조를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소개했듯 그것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개념이며, 심지어 하나의 확고한 스타일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의 구조적 요소를 기능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접근법이 더욱 빈번하게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며, 구조적 암시를 읽어낼 수 있는 시각적 독해력은 실험적인 독립출판물을 비롯한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인터넷이 일반화­되고 전자책이 확산 중인 이 시점에, 암시적 구조의 물리적이고 수행적인 특성에서 대안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보 전달을 위한 매체로서­ 글을 다루는 기본 채널의 역할을 스크린 매체에게 넘겨주고 자유로워진 인쇄 매체의 새로운 국면처럼 (마치 사진 등장 이후의 회화­처럼) 해석될 여지도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대부분의 시도들은 ‘디지털 시대를 위한 인쇄물의 새로운 형태’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형식을 통해 강화­하려는 디자이너(혹은 저자)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에 가깝다. 지면을 구성하고 글에 형태를 부여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있어 이러한 충동은, 건물의 설계 도면에 종교적 의미를 심고자 했던 건축가들이나, 악보에 우주적 원리를 반영하고자 했던 음악가들의 그것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그러한 충동은 신중하게 행해져야 한다. 구조적인 요소는 대개 디자인의 일부가 아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선을 끄는 특이함을 얻고자 섣불리 구조를 비틀어 버리면 정작 중요한 부분이 크게 훼손될 위험이 있다. 과도한 형태나 체계가 내용을 압도해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구조를 통한 암시의 시도는 항상 내용의 이해나 전달을 강화­하거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내용을 고려해 신중하게 활용된다면,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암시적 구조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내용을 손상시키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영역과 역할 내에서, 그것에 다른 차원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암시적 구조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과연 이 작업에서­ 그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암시적 장치들이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어떠한 내용은 그 자체로 말하며, 그러한 경우, 구조를 사용하든, 개념 기반의 보이지 않는 체계를 활용하든, 모두 불필요한 장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용에 개입하려는 디자이너의 과도한 해석의 욕구는 재앙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디자이너 제임스 고긴의 글에서­ 발견한 “디자이너가 내용과의 연관과 순수한 장식을­ 구분하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내내 떠올렸다. 방법이 무엇이든, 기본은 항상 그보다 더 중요하다.




후기

이 글은 서울시립대학교 디자인전문대학원 공공시각디자인 전공 2014년 졸업 논문으로 작성된 것이다. 편의상 '암시적 구조'라 명명한 이 주제는 지난 몇 년 동안 개인적으로 매료되었던 그래픽 디자인들에게서 발견된 특성들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에 따라, 글은 '발견'과 '정리'로 읽히고,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보다 새로운 무엇에 순진하고 덤벼드는 에너지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한 디자인 접근방식은 일시적인 트렌드로 치부될 만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에서 구조의 암시적 활용은 더 이상 새롭거나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효과적인 기본적 고려사항으로 남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활용가능한 시간의 한계탓으로 시작하면서 품었던 야심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쉬움이 큰 글과 작업이 되었지만, 디자이너에게 대학원 석사 논문보다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위로로 삼기로 했다.




관련 연구

'암시적 구조'라는 주제와 관련해 이 글과 더불어 다섯 가지 연구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구조적 문제 - 프로젝트들"




참고문헌

로버트 그루딘, 《디자인과 진실》, 제현주 옮김 (­: 북돋움, 2011).

루돌프 비트코버, 《르네상스 건축의 원리》, 이대암 옮김 (­: 대우출판사, 1997).

릭 포이너, 6개의 키워드로 풀어본 포스트모던 그래픽디자인》, 민수홍 옮김 (­: 시지락, 2007).

마츠다 유키마사, 《눈의 모험》, 김경균 옮김 (­: 정보공학연구소, 2006).

움베르토 에코, 《구조의 부재》, 김광현 옮김, (파주: 열린책들, 1998).

윤희철, 《현대건축과 음악과의 대화》 (­: 스페이스타임, 2005).

임근준, 《이것이 현대적 미술》 (­: 갤리온, 2009).

최성민 외, 《타이포잔치 2013 (서울: 안그라픽스, 2013).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배수희 외 옮김 (­: 세미콜론, 2007).

Ellen Lupton, Reading and Writing, Graphic Design: Now in Production, (Minneapolis: Walker Art Center, 2011).

Jack H. Williamson, The Grid: History, Use, and Meaning, Design Discourse: History, Theory, Criticism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James Goggin, The Matta-Clark Complex: Materials, Interpretations and the Designer, The Form of the Book Book (London: Ocasional Papers, 2009).

Graphic, 19, (2011년 가을).




원문 작성: 2014년 1월 17일 네이버 블로그



  1. 릭 포이너 《6개의 키워드로 풀어본 포스트모던 그래픽디자인》 민수홍 옮김 (서울: 시지락, 2007) p.80 참조. [본문으로]
  2.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배수희 외 옮김 (서울: 세미콜론, 2007) pp.507–8 참조. [본문으로]
  3. 윤희철 《현대건축과 음악과의 대화》 (서울: 스페이스타임, 2005) pp.17–9 참조. [본문으로]
  4. 로버트 그루딘 《디자인과 진실》 제현주 옮김 (서울: 북돋움, 2011) pp.83–6 참조. [본문으로]
  5. Jack H. Williamson ‘The Grid: History, Use, and Meaning,’ Design Discourse: History, Theory, Criticism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p.171–4 참조. [본문으로]
  6. Larry J. Solomon ‘Symmetry as a Compositional Determinant’ 참조. [본문으로]
  7. James Goggin ‘The Matta-Clark Complex: Materials, Interpretations and the Designer’ The Form of the Book Book (London: Ocasional Papers, 2009) pp.26–8 참조. [본문으로]
  8. 임근준 《이것이 현대적 미술》 (서울: 갤리온, 2009) pp.395–400 참조. [본문으로]
  9. 앤드류 해슬램 《북디자인 교과서》 송성재 옮김 (서울: 안그라픽스, 2008) p.68 인용. [본문으로]
  10. Jack H. Williamson 앞의 책 pp.180–2 참조. [본문으로]
  11. 마츠다 유키마사 《눈의 모험》 김경균 옮김 (서울: 정보공학연구소, 2006) p.87 참조. [본문으로]
  12. 《Graphic》19호 (2011년 가을) p.177 참조. [본문으로]
  13. 앞의 책 p.166 참조. [본문으로]
  14. Experimental Jetset 참조. [본문으로]
  15. James Goggin 앞의 책 참조. [본문으로]
  16. 잰 화이트 《편집 디자인》 안상수, 정병규 옮김 (서울: 안그라픽스, 2003) p.13 인용. [본문으로]
  17. Experimental Jetset 앞의 웹사이트 참조. [본문으로]
  18. 최성민 외 《타이포잔치 2013》 (서울: 안그라픽스, 2013) pp.226–244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