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rel Martens 《Counterprint》(2004)
언어: 영어
저자: 폴 엘리먼(Paul Elliman)
발행인: 카럴 퀴텐브루어(Carel Kuitenbrouwer)
발행처: 하이픈 프레스, 런던(Hyphen Press, London)
초판발행: 2004년
편집: 카럴 퀴텐브루어(Carel Kuitenbrouwer)
디자인: 한스 흐레먼(Hans Gremmen)
ISBN: 0-907259-25-1
40페이지
가격: 35달러
‘더치 디자인 신드롬’의 중심에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카럴 마르턴스는 이제 설명하기도 새삼스러운 그야말로 거장이다. 그래도 일단 이 책에 수록된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카럴 마르턴스 (1939년생)
아른험 예술학교를 졸업한 1961년부터 타이포그래피를 특기로 하는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비상업적인 개인 작업과 입체 작업도 병행해 오고 있다. 주요 클라이언트로 1960년대에는 아른험의 반 로휨 슬라터뤼스(Van Loghum Slaterus) 출판사, 1975년에서 81년에는 네이메헌의 선(the Sun) 출판사가 있다. 그는 책과 그 외 다른 인쇄물들 뿐 아니라 우표와 공중전화 카드도 디자인한 바 있으며, 많은 건물들의 사인과 파사드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건축잡지 《오아서》(Oase)의 디자인으로 베르크만 상(H.N. Werkman Prize)을 수상했고, 1996년에는 하이네켄 예술상(Dr A.H. Heineken Prize for Art)을 수상했으며 그 일환으로 그의 작품들을 다룬 책 《카럴 마르턴스: 인쇄물》(Karel Martens: Printed Matter)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업은 로테르담 디자인 상(the Design Prize Rotterdam)에 세 번 노미네이트되었는데, 1995년에는 PTT 텔레콤의 전화카드 표준 디자인으로 명예상(honorary commendation)에 선정되었고, 1997년에는 책 《카럴 마르턴스: 인쇄물》로, 1999년에는 에데(Ede) 소재의 베인만(Veenman) 인쇄소를 위한 파사드 디자인으로 노미네이트되었다. 1998년에는 라이프치히 북 페어에서 《카럴 마르턴스: 인쇄물》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디자인된 책’ 골드 메달을 수상했으며, 그의 책들은 ‘가장 훌륭하게 디자인 된 네덜란드 책 공모전’(Best-Designed Dutch Books competition) 연감에 수 년간 꾸준히 수록되어왔다.
1977년 아른험 예술학교를 시작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쳐온 그는, 이 후 1994년부터 1999년까지는 마스트리트 소재의 얀 반 아이크 아카데미(Jan van Eyck Academie) 소속이었으며, 1997년부터는 예일대학교의 그래픽 디자인부 초청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해 아른험의 아르테즈에서 비허르 비르마(Wigger Bierma)와 함께 석사 수준의 타이포그래피 워크숍인 ‘타이포그래피 공방’(Werkplaats Typografie)을 시작했다.
주간지 정도의 볼륨을 지닌 카럴 마르텐스의 《카럴 마르턴스: 카운터프린트》는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부클릿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편집자 또한 서문에서 ‘부클릿’이란 단어를 언급한 바 있기도 하고.) 게다가 각 페이지들이 접지된 채로 제본되어 아래쪽이 트여있는 형태라 내용은 이 얇은 책 두께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글은 편집자 서문과 폴 엘리먼의 세 페이지 분량의 에세이 한 편이 전부다. (폴 엘리먼의 이 글은 《아이디어》(Idea)지에도 실린 바 있다.) 만일 카럴 마르턴스의 작품들이 캡션들과 함께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고 인터뷰도 수록된 ‘작품집’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 책은 카럴 마르턴스의 소소한 개인작업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묶어서 보여주는 부클릿으로, 그의 클라이언트 작업들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던 형태와 컬러의 실험들을 보다 날 것의 느낌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이미지들은 1990년대에 제작된 레터프레스 작업물을 같은 크기로 재생산한 것과 그의 스튜디오 벽 핀보드에 관해 그가 찍은 영상물과 암스텔빈 극장을 위한 작업의 파생물 등 인쇄물을 가지고 행해진 습작들을 담고 있다. 음반으로 치자면 팬들을 위한 B-side곡이나 미발표곡을 모은 소품집 정도가 되겠다. 정규 앨범이라 할 만한 그의 책은 하이픈 프레스에서 앞서 발간한 《카럴 마르턴스: 인쇄물》일 것인데, 이 책은 이제는 너무 고가의 수집품이 되어버렸기에 (아마존닷컴에서 확인한 바 2002년의 두 번째 에디션 중고품이 300달러를 호가하고 있었다.) 많은 팬들은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슬기와 민의 책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에 의하면 하이픈 프레스에서 곧 이 책의 세 번째 에디션이 나온다고 하니 그 때까지는 이 책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는 수 밖에 없겠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집자 서문과 폴 엘리먼의 에세이를 직접 번역한 것이다. (매끄럽게 다듬지는 않았지만 구글 번역기보단 나을 것이다.)
서문 / 카럴 퀴텐브루어
1980년대 중반 카럴 마르턴스의 작품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다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세심하게 배열된 인쇄물의 조각들을 통해 전해지는 내향적인 특질의 감각이 그가 네이메헌의 선 출판사를 위해 만들었던 이미지의 극단적인 엄격함과 잘 조화되지 않았던 탓이다. 당시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후 내가 그의 작업을 더 잘 알게 되면서 그의 개인 작업과 의뢰받은 작업 간의 연관성은 좀 더 분명해졌다. 개념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추상과 가독성, 실용적인 것과 독특한 것, 산문과 운문, 이런 것들 간의 경계에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 중에서도 그가 최근 몇 년간 제작해온 건축관련 작업은 그의 표현방식이 단지 타이포그래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간략한 모음집에 불과한 이 개인작업물은 어떠한 외적 동기도 없고 본질적인 필요성에서도 벗어난 듯 하다. 마르턴스가 이 책의 출판에 참여하기를 망설인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여기 수록된 이미지들이 재생산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르턴스가 이러한 작업들(그는 이를 절대 예술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을 전시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완성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팔지도 않는다. 사실 그것들이 예술작품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솔직히 이 부클릿의 발기인과 발행인들은 그러한 애매한 이야기들보다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이 작가가 그러한 평판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이는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 흥미를 가졌다. 결국 마르턴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의 협조적인 성격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그저 오래된 어떤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도전이라는 점이었다.
폴 엘리먼의 산뜻한 에세이와 한스 흐레먼의 탄탄한 디자인과 더불어, 이 결과물은 (적어도 나의 보잘것없는 생각으로는) 흥미롭고도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이 출판물은 아인트호벤에 위치한 인쇄 회사인 렉터리스가 1974년부터 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27번째로서 고안된 것인데, 30년 전에 시작된 이 시리즈는 그 동안 거의 매년 하나의 이슈를 다루어 왔다. 아트와 디자인 분야의 매우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유명한 렉터리스의 이 다큐멘터리는 인쇄업자들의 통상적 출판 제작물들보다 훨씬 더 심도가 있다.
마르턴스의 첫 번째 책인 《카럴 마르턴스: 인쇄물》이 성공적이었기에 이 책도 당연히 영어권에 소개되었다. 책의 네덜란드 판 제목은 번역하기 어려운 인쇄업자들의 용어인 ‘weerdruk’인데, 영문제목으로는 단어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풀이한 방법을 택했다.
인쇄 표면으로서의 세계 / 폴 엘리먼
나의 개인 작업은 어떤 것들의 수집과 관련이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집단적인 형태를 반영하는 글자 세트와, 글자 모양을 띤 작은 공업적 파편들(절대로 표준화될 수 없는 무작위적인 크기와 이상한 형태들을 가진 수백 개의 ‘타이포그래피적인’ 문자들)을 모아두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카럴 마르턴스가 비슷한 수집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교환하자고 해볼 수 있겠다는 정도였다. 파니니(Panini) 풋볼 스티커를 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카럴 마르턴스가 주워 모은 (그리고 잃어버린) 기계 부품들의 상자를 뒤져보고 나자, 그에게 있어 ‘글자스러움’을 지닌 모양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것들 대부분은 그저 기하학적인 형상물이어서 단어보다는 숫자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할 법도 했다. 심지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인 듯한 원반 모양조차도 모호한 상태였다. 그것들은 글자일까? 숫자일까? 아니면 그냥 동그라미인가? 모든 물체들은 적어도 한 면은 완전히 평면이었는데, 덕분에 그 조각들은 인쇄 스탬프로도 사용될 수 있다. 수 년 동안 카럴 마르턴스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타이포그래피적인 모티브가 되어온 것은, (지금은 더 두드러지는) 타입이라기보다는, 평평하고 공업적인 일련의 형태들로부터 블록으로 인쇄되는 레터-프레스의 원형과 같은 것들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결국 몇 가지 물건들을 교환했는데, 모티브가 되어줄 서로 다른 물건들을 제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주워 모은 이 글자들은 기술과 언어 (하나의 고장난 거대 기계로서의 세계) 사이의 분열된 투쟁의 일부로서 나의 흥미를 끈다. 반면 카럴 마르턴스의 작은 금속 형태들은 디자인 제작의 특정한 방식 (종이부터 유리나 콘크리트에 이르는 다양한 표면들 위에서 상호작용하는 특정 방식의 인쇄와 색상의 역동성, 그리고 그 발광성이나 불투명성)에서 훨씬 더 즉각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수집이라는 것은 대개 우리 주위의 세상을, 그 일부분만이라도 제어하기 위해 얼마간 잡아두려는 시도이다. 이 풍족한 수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물을 멈춰두려 하는데, 이는 사물을 기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완결된 행위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와 달리, 아티스트나 디자이너는 사물의 지속성을 선호할 것이다. 아니면 삶의 어떤 불확실성을 복위시킴으로써 그 소중한 수집품들을 모방하려할 수도 있고.
그 수집품들은 지나치게 과다한 간판과 사물 제작에 맞서 임계값을 요구하는 방식일 수도 있고, 일종의 서사도구일 수도 있다. 그 변화무쌍한 성질들을 어떤 문학적 형식이나 음악에서의 테마나 변주로서 동일한 목록을 공유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그저 당신이 좋아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들의 한 무더기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수집품들의 이러한 용도들 중 어떤 것을 현대미술에서 찾기 위해 멀리 볼 것도 없다. 형태를 끊임없이 대체시키기 위해 묶여진 기계생산 제품들이나, 일상용품들의 조직적인 배열로 방을 채우는 것은 예술계의 클리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예로,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광선총들’(ray guns)과, 주워 모은 수 백 개의 ‘L’자 모양 물건들(‘보편적인 각도’(the universal angle))은 이미 알파벳에 관심을 둔 수집을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최근의 예로는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급진적 쓰레기수거’(radical scavenging)를 들 수 있는데, 이 작업은 그나 그의 작품을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보낸 물건들에 의존한다. 그의 구부러진 철사(총 모양 물건들이나 글자들을 만드는 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견 그것들은 주차장으로부터 온 것 또는 자동차들을 방해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에 대한 음흉한 수집을 추가할 수도 있겠다.
디자이너의 역할이 갤러리 아티스트의 역할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재료와 물건들, 코드와 사인들의 관계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디자이너가 우리의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 방식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쟝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사물의 체계》(Le systeme des objets)라는 책에서 수집된 사물의 사용과 비사용 간의 순환을 논하면서, 활발한 대중적 사용이나 순환 속에서의 물리적 사물의 경험을 강조했다. “소유는 수단에는 적용할 수 없다. 내가 이용하는 사물이 항상 나로 하여금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능적인 물건은 수집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하고 또 계속 사용하게 만드는 그것의 능력을 통해서 일종의 죽음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물질주의자의 문화적 관점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하다. 우리의 모든 사물들은 (말과 같이 개념적인 사물들을 포함하여, 딱 물리적인 도구들만큼만) 우리의 관습과 인식을 결정지음으로써 사용자인 우리의 모습을 빚어낸다. 수집(또는 다른 어떤 표현 형식)은 세상과 그 물건들이 우리를 거쳐가는 방식의 이러한 측면을 어느 정도 거부하는 것처럼 조직될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종합해서 판단할 것인지 이야기해주는 살아있는 것들일 수도 있고.
내가 자신을 수집가로 여기는지 물었을 때 카럴 마르턴스는 아니라고 말했다. 적어도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거나 사물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집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의 소유물들에 사로잡힌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사물의 무리들과 그것들의 배열, 그리고 그 반응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쪽이다.”
“또한 나는 내 물건들을 가지고 작업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내 주위 사물들을 재활용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는 내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다른 특별한 장치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언어 속에서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언어로 작업하고 싶다.”
호흐 케펄(Hoog Keppel)에 자리한 카럴 마르턴스 스튜디오의 뒷 벽은 주워 모은 이미지들과 커팅들, 프린터의 등록마크들, 뉴스 헤드라인들, 단어들, 컬러차트들, 특이한 타이포그래피 조각들이 축적된 거대한 핀보드이다. 이렇게 스쳐 지나치는 보물들을 수집하는 것은 마치 (마르턴스가 그러한 사물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의 평행우주가 그를 발견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사물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지역신문이나 우유팩 접은 것, 주차티켓 뒷장과 같은 가장 일상적인 장소들에 무심코 침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떤 시작이나 끝이 없음을 드러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하나의 수집이다. 시각적 물건들의 광경은 기준점들이 이루는 망처럼, 현재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카럴 마르턴스 자신의 접근법을 성격지온 근래의 예술과 디자인 역사 모두를 아우른다. 그는 독일의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인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를 참고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인쇄공인 H.N. 베르크만(H. N. Werkman)처럼 말이다. 1930년대, 그의 상업 인쇄소는 침체에 빠졌고, 베르크만은 자칭 ‘druksels’라 부른 더 실험적인 인쇄를 위해 자신의 타입케이스에 있는 글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폴리네르(Apollinaire)와 피카비아(Picabia)의 다다(Dada)와 연관되곤 했던 캘리그램과 기계도상학의 결합물이 되곤 했는데, 이는 슈비터스가 하노버에 있는 자신의 그래픽 디자인 사무실 쓰레기들로부터 나온 폐품들을 가지고 했던 재작업과도 여러 모로 연결된다.
그러나 카럴 마르턴스 자기 작업에서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항상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나 그가 수련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그의 스승인 애덤 로스캄(Adam Roskam)과 헹크 피터스(Henk Peeters)가 그렇다.
“작업 자체는 그리 대단하진 않았지만, 함께 일할 때 피터스는 일종의 에너지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표현해냈다. 로스캄은 문학에 능통한 것을 비롯, 훨씬 더 전통적인 가치들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내게는 일종의 풍요였다. 그리고 당시 나는 로스캄과 함께 할 때 더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나 자신보다도 더 나를 믿어주었다.”
로스캄은 목판화, 회화와 더불어, 무거운 크라우스 북바인딩 프레스를 사용해서 나뭇잎과 양치류들을 프린트하는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는 카럴 마르턴스에게 이 프린트 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중에 로스캄이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그는 그 프레스기를 자신의 석판화석과 함께 마르턴스에게 주었다. 1964년, 동적상자구조를 위한 마르턴스의 초기 프린트 작업 중 하나는 시계의 무브먼트와 서로 교차함에 따라 광학적으로 반응하는 두 개의 망점 프린트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 인쇄된 상자는 마르턴스의 과거로부터 온 물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판화와 다른 그래픽 제작 언어를 위한 직관과 결합시키는 그의 이후 작업의 특성 중 많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헹크 피터스는 공업적, 유기적 재료의 인간적 활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네덜란드 아티스트 그룹인 널(Nul)의 멤버였다. 두 선생들 중 피터스가 역동적인 질감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형태들에 대한 마르턴스의 감수성에 더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나의 프린트들은 금속 스텐실, 접자, 금속공이나 목수들의 작업실에서 나온 실제 도구들, 실제 인쇄공의 블록들, 홀위트(holwit), 인테르, 공목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의 레고와 메카노 세트들의 일부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아파트 건물을 떠올리게 하는 금속 그릴들과, 공업적으로 보이는 텍스쳐를 만들어내는 거친 철조각들을 찾기도 했다. 나는 항상 예술적인 쪽보다는 공업적인 느낌을 선호했다. ‘드럭’(druk) 잉크가 물감보다 훨씬 더 작업하기가 좋다.”
“내가 모은 물건들은 금속이어야 했는데, 그래야 자석으로 깨끗하게 들어올려서 잉크가 말랐을 때 다른 색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겹의 색상을 더하기 위해 하룻밤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좋다. 네 개의 색이라면 나흘이다. 원색의 혼합이나 데이글로(dayglo)도 좋고. 나는 항상 색상들의 수수께끼에 매료되어 있었다. 노랑에 파랑을 더해서 녹색이 되는 것은 내겐 아직도 흥미진진하고 놀랍기만 하다.”
카럴 마르턴스의 색상과 형태에 대한 재료로서의 직관은 근래에는 스튜디오 기반 연구들과 밀접한 일련의 건축적 프로젝트들에서 더 큰 스케일로 확장되었다. 로테르담 소피아 아동병원을 위한 벽돌 작업의 납틀에는 시인 유디트 허츠버그(Judith Hertzberg)의 글이 파란색과 하얀색 LED의 작은 매트릭스로 구현되고, 컬러 타겟 아이콘 시리즈는 암스텔빈 문화센터의 유리벽 패널들에 나타나며, 할렘 음악극장의 외벽 작업에서는 현대 음악 작곡가인 루이스 안드리센(Louis Andriessen)의 악보가 건물의 파사드를 따라 튀어 다니는 열 네 개의 패널 소노그램(sonogram: 초음파를 이용한 검사도)으로 번역되었다.
카럴 마르턴스의 스튜디오 개인공간에서는 그의 더 개인적인 작업이 특정하지만 지금은 친숙해진 속성들과 시각적인 아이디어들에 의해 특징을 갖추어간다. 예를 들면, 추상적인 아이콘들과 어우러지거나, 스튜디오 벽에 꽂힌 수집물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듯한 타입과 색상의 기묘한 병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훌륭한 색상의 모노프린트나 아스키 배열 이미지 시리즈, 작업의 완벽한 카리스마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무언가를 만드는 개인적인 즐거움에서 오는 어떤 에너지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열정은 의뢰받은 작업에도 깃들어 있는데, 이것은 번화가의 스케일로, 혹은 건물의 공공 공간 속에서 구현될 때조차도 그러하다. 또 이러한 방식은 크기와 템포에서 뿐 아니라 환경적인 맥락에서도 적절하게 느껴지는데, 마르턴스의 인쇄기술에 대한 본능 중 많은 부분이 더 넓은 세계가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의해 강화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둘러싼 사물의 언어 속에서 작업하거나 생각함으로써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카럴 마르턴스는 내게 시차 조망(parallax view)의 효과들을 몸소 발견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기차의 창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것은 네덜란드 시골의 릴리프(relief) 형태들 속에서 일종의 모아레를 드러낸다.
“학생시절 나는 매일 네이메헌과 아른험 간을 오갔고, 기차에서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발견했던 것 같다. 야외에서, 논에서. 예로, 수 백 개의 나뭇가지들로 만들어진 릴리프 속에서 내 눈은 각도와 시점이 변하고 기차가 지나감에 따라 이동하는 화면 효과를 따른다.”
“이런 방식으로 들판을 보는 것은 어떤 무리의 사물들이 합쳐져서 다른 어떤 것이 되고, 50 혹은 그 이상의 같은 것들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방식을 깨닫게 했고, 내 눈을 열어주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각구획 작물들에 대한 움직임과 시점의 효과는 내게 프레임, 그리고 프레임 안에서 서로 돕는 사물들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었다. 이것은 사물, 색상들과 함께 일어나는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반응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물은 다른 하나에 색상을 부여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각기 고유의 이야기를 인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공업화된 짧은 형태의 폐품들로 이루어진 카럴 마르턴스의 급조된 도구들은 살아서 그들 세계의 일각을 유지해 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또 부숴지는지), 언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각과 인식이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것들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한 세트의 물건들.
수집품들이 아니라 사물들의 모임이고 그것들의 배열이며, 그것들의 반응이다.
원문 작성:
2009년 8월 26일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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