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리스트'(http://www.trendlist.org/)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제목 아래에는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시각적 트렌드 탐구"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에는 '트렌드'와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이 한 문장에 자리하는 것에 좀 갸우뚱했다. '트렌드'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는 마케팅에 중점을 두는 주류 산업 영역에서 사용되는 반면,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은 그와는 거리를 두는 보다 급진적인 (주로 문화예술 영역의) 디자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웹사이트에 제시된 설명은 이렇다.
"패션이나 음악처럼 그래픽 디자인도 동시대적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디지털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송되는 세계에서는 더 심해진다. 트렌드 리스트는 이러한 그래픽 디자인 경향들을 조사하고 명명하고 분류하는 일을 맡는데, 그러한 경향들이 어디서, 언제 일어나는지, 어떤 나라들에서 인기가 있는지,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 진화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트렌드 리스트는 문화 영역의 포스터, 책, 도록, 잡지, 앨범 표지, 초대장을 소개한다. 이러한 작업이 실험의 장이고, "가장 현재적인" 그래픽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얼마나 많은 "전문"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를 위한 주문 작업에서 (요즈음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는) 형식적 외형보다 내용에 더 가치를 두는 "개념적" 디자인을 만들어내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들은 시각 언어와 모티프들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이것들은 하나의 트렌드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트렌드 리스트는 반대의 시각으로부터 그래픽 디자인을 탐구하는데, 작업의 내용은 무시하고 그 외양만 분석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리한 형식적 특질에 기반해서 분류하고 목록화한다.
그런데 시각성을 내용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이 가능할까? 추가적인 설명 없이 그래픽 디자인을 제시하는 건?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작품들이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관객이 작품의 표면 아래에 닿을 수 없는 그 모든 그래픽 디자인 전시들에서 그렇다. 관객들은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 그저 시각적으로 디자인을 인지할 뿐이다.
트렌드 리스트는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이는 그래픽 디자인이 (다른 모든 것들처럼) 특정한 트렌드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하지만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순수한 컨셉에 기반한 자신들의 작업의 고유성을 여전히 주장하기도 한다.
빔 크라우얼은 "당신은 항상 당신 시대의 총아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우리를 둘러싼 규칙과 스타일들에 눈감는가? 우리는 항상, 연습을 하면서까지도 독창적이고 새로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결국 누군가가 현대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픽 디자인을 탐구하고, 영감을 고취하며, 트렌디함을 유지하라!"
설명에 언급된 것처럼, 트렌드 리스트의 작품들은 그 컨셉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고려 없이 순수하게 그 시각적 속성에 따라서만 다루어진다. 어떠한 의도와 과정에 따라 만들어졌든지간에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동시대적 그래픽 디자인에서 보게 되는 시각적인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트렌드 리스트의 작품들은 제목, 디자이너, 국가, 연도 이외에 다른 설명 없이 제시되고, 그 내용이나 컨셉 등 더 많은 정보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제공된 작품 출처 링크를 따라가면 된다.
작품들은 국가별, 디자이너/스튜디오별로 분류되어 있는데, 역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트렌드별 분류로, (글을 고쳐쓰는 2015년 11월 현재) 33가지가 소개되고 있다. 각각은 그래픽 디자인의 다양한 요소들에 걸쳐 있는데, 여기에는 책이나 인쇄물들의 구조나 구성(다양한 판형, 목록, 표지의 본문, 노출된 내용), 레이아웃(텅 빈 지면, 상/하/좌/우, 사선 구도, 무작위), 색상(그래디언트, 형광색, IK블루), 타이포그래피(하이픈, 밑줄, 취소선, 하이라이트, 중앙정렬, 계단형, 패스 상의 활자, 자간, 늘이기), 이미지(스캔, 별, 다이아몬드, 무한대 형상, 고대 석상, 미키 마우스 손)를 비롯한 기타 그래픽 요소들(원, 마름모, 프레임, 사선, 사선 패턴, 물결 그래픽, 정물 사진)이 포함된다.
다양한 포맷 (Various Formats)
"한 권의 책에 다른 크기, 다른 종이 등 하나 이상의 포맷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종종 챕터 구분 등을 위해 책 전체에 적용되곤 하는데, 때로는 남용되어 책이나 카탈로그가 제 기능을 잃고 읽기 힘들어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은 예전부터 존재했으나, 2000년대 말부터 문화예술계 출판물에서 특히 애용되어왔고,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내용을 나누어 놓는 기능적인 역할을 하지만, 단지 흥미로운 외형을 위한 표지의 장식적 요소로 활용되기도 하며, 드물게는 특정한 암시를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책을 읽어나가는 흐름 속에 이질적인 크기나 재질의 지면이 끼어들게 함으로써 독자의 의식을 지면 밖으로 끌어내어, 물성을 지닌 사물로서의 책을 인지시키는 효과도 있다.
<http://www.wikileaks-kr.org/dokuwiki/list> (구엔앰, 2013)
목록 (Table of Contents)
"명단이나 목차, 항목들이 책/잡지의 표지에 바로 배치되는 것으로, 개념적 접근의 인상을 준다."
목차, 색인 등은 책에서 가장 기능적인 부분인데, 책의 인상을 대표하는 표지에 독자를 친근하게 이끌고자 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장식 같은 요소들이 아니라, 책의 안쪽에 내용으로 수록되던 이러한 요소를 배치하면, 텍스트 구성 자체에 대한 관심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인 느낌을 준다.
표지의 본문 (Text on Cover)
목차나 목록이 아닌 본문의 일부가 표지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책의 핵심적인 부분이 발췌되어 수록되는데, 더 흥미로운 경우는 아예 본문이 앞표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표지에 시선을 끄는 요소 대신 본문 지면 레이아웃이 등장하는데, 표지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표지는 명백히 탈관습적이고, 그만큼 평범하지 않은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대개 구조에 관한 아이디어를 지니는 개념적 접근의 디자인으로, 이론/담론서 등 지적인 내용의 책에서 자주 발견된다.
클래식으로는 리처드 홀리스가 디자인한 펭귄문고의 <Ways of Seeing>이 유명하다. (국내 번역본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디자인은 아쉽게도 이를 따르고 있지 않다.)
노출된 내용 (Exposed Content)
"지금 가장 인기 있는 트렌드들 중 하나로, 주로 책이나 잡지의 표지에서 볼 수 있는데, 다양한 구성으로 배치된 이미지들이 안쪽의 내용을 드러낸다. 이러한 종류의 디자인은 모든 작품이 한 지면에 인덱스되는 포스터처럼 미술 전시를 위한 시각물에 아주 잘 어울린다. 타이포그래피는 대개 이 레이어 위에 놓인다."
표지를 내용의 전시장처럼 활용하는 이러한 방식은 내용을 보다 먼 거리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하거나, 객관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 시각적으로 밀도 높은 지면을 최소한의 근거가 있는 이미지와 텍스트로 채울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쉬운 (또한 게을러 보일 수 있는) 해결책이기도 하다. 내용에 따라서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텅 빈 지면 (Empty)
"대개는 단순한 타이포그래피와 커다란 여백으로 구성된 책 표지들이다."
아주 단순한 타이포그래피만 배치되고 대부분을 여백으로 두는, 더 심하게는 바탕 색상 외에 아무 것도 없는 표지 디자인은 사진이나 그래픽 이미지들로 가득찬 표지와 대조적으로, 책을 한 덩어리의 물리적 사물로 인식되게 한다. (인쇄 없이 디보싱이나 엠보싱 등의 물리적 가공만 가해서 그러한 성격을 더 강화하기도 한다.)
이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실현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레터폼 작업 등을 통해 로고나 제목이 두드러지게 표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이러한 디자인은 관습적인 디자인에 익숙한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이 싫어한다. 디자이너의 노력과 기술 투여의 흔적을 발견할 길 없이 비워져 있는 공간이 (그럼에도 지불해야 하는 디자인 비용이) 너무나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부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어려울 것 같다는 불안감이고. (하지만 많은 경우, 화려한 이미지들로 뒤덮인 출판물들 사이에 놓였을 때 이러한 빈 공간은 오히려 더 시선을 끌고, 제목이나 다른 디테일에 따라서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때문에 디자이너가 이러한 절제된 디자인을 통제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작업 전반에서 개념적 엄격함을 유지해야 한다.
상, 하, 좌, 우 (Left, Right, Up and Down)
"이 타이포그래피 트렌드는 판형의 각 측면들에의 단어 배치로 이루어진다. 상당히 전위적으로 보이는 구성이지만, 큰 단점이 하나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네 가지 다른 방향으로 읽도록 강요한다는 것인데, 이는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지면의 상, 하, 좌, 우에 각각의 방향으로 세팅된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은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데, 특별한 고민 없이 컨템포러리한 디자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자주 남용되곤 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독성은 너무 작지 않은 크기의 많지 않은 내용이라면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이 특히 애용해온 형식.
사선 구도 (Slant)
"판형이 다른 색상의 두 부분으로 구획된다. 대개 한쪽 모서리에서 반대편 모서리로 정확히 이등분한다."
특별한 레이아웃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구현할 때에는 꽤 대담해져야 하는 방식이다. 경계에 걸쳐진 하나의 내용/이미지가 두 가지 버전으로 반씩 보여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가 어긋나게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시각적 효과를 의도해 사용되기도 한다.
무작위 (Randomized)
그리드 없이 무심하게 던져놓은 듯한 무작위적 배치는 지면에 활력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대개는 순수한 무작위라기보다는 무작위적으로 시작해 세심하게 조형적으로 조정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조형적인 훈련을 거친 디자이너가 의식적으로 무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다. 물리적으로 조각들을 던져 놓고 그 배치를 가져다가 아주 눈에 거슬리는 약간의 부분만 조정해서 만들기도 한다. 정확한 정보 전달이 필요한 경우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래디언트 (Gradients)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다양한 그래디언트 스펙트럼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디자인은 컴퓨터를 이용해 쉽고 빠르게 생성되는데다, 팬시해 보여서 클라이언트가 돈을 쓸만 하다고 여기게 한다. 하지만 이 형식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용될 때조차도 시선을 끌게 수 있다. (아마도 자연적으로는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디언트는 어도비 소프트웨어에서 손쉽게 구현이 가능하면서도 시각적으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남용되는 형식이다. 이제는 매우 흔한 장식적 효과들 중 하나가 되었다.
형광색 (Neon Colors)
"밝고, 생생하고, 빛을 반사하며, 시선을 끄는 색상들로, 매우 인기가 있다. 이러한 색상들은 스크린 프린팅에서 사용되곤 하는데, 눈을 자극하는 강력한 인상을 지닌다."
CMYK로 구현되지 않아 별도의 잉크를 사용해야 하는 인쇄매체와 달리, RGB 컬러의 스크린 매체에서는 간단하게 구현이 가능한데, 웹 포스터를 비롯한 스크린 매체의 비중이 높아진 오늘날 더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컬러는 때로는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때로는 산업적인 느낌을 주는데, 자칫 이도 저도 아닌 경우 세일 홍보 전단지 그래픽처럼 보이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프랑스의 예술가 이브 클랭(Yves Klein)으로 인해 잘 알려진 인터네셔널 클랭 블루는 짙은 울트라마린 청색으로, 이 강렬한 색상은 그래픽 디자인에서만이 아니라, 패션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색이 되었다."
그저 청색일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청색은 예전에는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청색이 주도적으로 사용된 디자인들 중 상당수는 IK 블루를 의식한 선택임이 분명해 보인다. IK 블루는 이브 클랭이 특허를 가지고 있는 특정한 청색이지만, 클랭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은 유사한 청색으로 모방하기도 한다. (물론 문제가 될 것은 없다.)